1775년 11월, 오스트리아의 성 마틴 대성당에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양국 간의 국제 결혼식이 거행되어 전 유럽인의 주목을 받았다.
양국의 우호 사절단은 모두 대성당에 모여 신혼부부를 축하했다. 신랑 신부는 성단앞에 끓어 앉아 교황청 특사 앞에서 머리가 파뿌
리가 될 때까지 변함없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곘노라고 맹세했다. 이튼날,안토니아 공주는 500대가 넘는 마차의 호송을 받으며 빈
왕궁을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녀가 바로 후대에 유명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이다.
왕자와 공주를 태운 마차가 파리에 도착했다. 아리따운 시녀 네 명이 마차 앞으로 다가와 마차에서 내려오는 공주를 모셨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앞으로 가서 가볍게 무릎을 꿇어 절을 올렸다. 국왕은 그녀를 한 번 보고 나서 몸을 일으키라고 하며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그녀를 안아 준 다음, 이마에 키스를 했다. 스무 명의 귀부인들이 태자비를 둘러싼 채 그녀를 침실
로 인도했다. 공주가 도착하고 나흘째 되던날, 예정대로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다시 한 번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혁명의 빌미를 재공한 여성으로 후세에 이름을 널리 알렸졌 있다. 그녀가 낭비벽이 심
하고 놀기 좋아하는 여성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가난한 민중에게 내뱉은 유명한 말인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
아요?" 라는 대명사는,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녀는 선천적으로 사치스럽고 놀기 좋아하는 여성이
었을까? 사실은 그렇치 않았다. 그녀가 노는데 빠진 이유는 남편 '루이' 16세에게서 남성의 매력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는 조용하고 점잖은 성품으로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발기가 잘 되지않아 남편으로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못해 그의 아내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두사람 사이에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다는 사실은 곧 그녀의 모친' 마리아 테레사'와
오빠 '요셉'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는데, 결국 '루이' 16세는 수술을 하게 되었고 수술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두사람은 훗날 네
명의 자녀를 낳았다.그러나, 끝내 두 사람은 민중의 신뢰를 얻는데 실폐했고, 프랑스혁명의 단두대 위에 이슬로 사라졌
다 .
1악장 (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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